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해협 해전 (문단 편집) === 전투 결과 === * 아군 피해 * 2명 전사 * 전병익 일등병조(사후 추서, 71포 탄약수, [[1929년]] [[6월 24일]]생, 1948년 6월 해군신병 제10기, 교전 3일 뒤 사망.[* 사망 당시 21세로 전사 59년만인 2009년 11월 11일에 을지 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이렇게 늦은 이유가 김창학 이등병조와는 달리 전병익 일등병조의 유족들과는 연락이 되지 못했기 때문. 결국 여동생을 어렵게 찾아서 09년 11월 11일에 열린 제64주년 해군창설 기념식에서 무공훈장을 받았다.]) * 김창학 이등병조(사후 추서, 조타수, [[1929]]년 [[1월 29일]]생, 1948년 6월 해군신병 제10기, 현장에서 치료도중 사망.[* 전사 당시 21세. 치명적인 흉부 관통상을 입은후 치료도중 '''적함은 어찌 되었습니까?''' 라고 갑판사관에게 물어보았고 그가 '''괜찮다. 모두 침몰하였다.'''라는 대답을 하자 사망직전에 '''갑판 사관님. 끝까지 싸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라는 말을 남기고 절명 하였다고 한다.] [* 당시에도 유족들과 연락이 되지않고 있었던 전병익 일등병조와는 달리 당시 전투에 참여한 해군전우회 60명은 정기적으로 유족들과도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9월 28일에 그가 졸업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부용초등학교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 * 2명 부상 * 김종식 소위 (병기관) * 김춘배 삼등병조 (주포 전환수) * 백두산함 조타실 및 주포 아래 피격. * 적군 피해 * 적 수송선 격침, 승조원 및 육전대 600여 명 전원 사망(추정) ||<-2>[[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20626190516.jpg]]|| || 김창학 삼등병조 || 전병익 이등병조 || 국군의 두 전사자의 유해는 포항에서 진해로 옮겨져 경남 진해 시내 평지봉 기슭에 안장되었고, 전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